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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쌍화점>의 왕후는 한 남자만 사랑했을까-고려시대의 재혼

영화 <쌍화점>의 왕후는 한 남자만 사랑했을까-고려시대의 재혼


영화 <쌍화점> 중 왕과 왕후 

고려말이 배경인 영화 <쌍화점>이 인기를 끌면서 고려시대 풍습까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재혼 풍습'은 어땠을까요?
과부가 수절하면 가문의 영광이라 하여 열녀비까지 하사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이혼녀'가 왕과 재혼하여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려 충렬왕의 비였던 숙창 원비 김씨와 고려 충숙왕 왕비인 수비 권씨가 대표적입니다
.
전남편이 지체가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강제로 이혼하고 왕과 재혼해 왕비가 되었답니다.
순비 허씨도 원래 왕현에게 시집 가서 3 4녀를 낳았는데 1309년 다시 결혼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네요.

자녀 일곱을 두고도 왕과 재혼하여 왕비가 되었다니!
700년이 흐른 요즘에도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순비 허씨의 미모가 워낙 출중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혼한 여성 혹은 사별한 과부가 왕비가 된 것에는 미모가 많이 작용했다고 하네요.
시대에 따라 미인의 기준은 바뀌지만 외모가 중시되는 것은 영원한 트렌드 같습니다. 

, 숙창 원비는 워낙 세도가 당당해서 원 황실의 황태후로부터 고고라는 관을 하사 받고는
스스로 그것을 쓰고 사신 환영연에 참석하여 귀족들로부터 많은 폐백을 받았다고 합니다
.
이때 원비가 하사 받았던 고고가 우리가 잘 아는 족두리로 발전했다고 하네요.


영화 <쌍화점> 중 왕후와 그녀가 사랑한 무사 홍림


이와 반대로 왕의 후비가 평범한 사내와 재혼한 일도 있습니다
.
<
태종실록>을 보면 고려 우왕의 후비였던 선비 왕씨가 재혼한 사실이 있습니다.
"신 등이 보건대, 신씨(辛氏)가 비록 위조(僞朝)의 임금이나, 한 나라에 군림(君臨)하기를 16년 동안이나 하였고,
지금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유은지는 그 작록을 받고 북면하여 섬기었으니, 진실로 군신의 분수가 있습니다
.
위주(僞主) 신씨(辛氏)가 일찍이 죽은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왕흥(王興)
의 딸을 받아들여
이를 봉
()해 비자(妃子)로 삼았었는데, 신씨가 망한 뒤에 은지가 전날의 군신의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고
,
그 비() 왕씨(王氏)로 자기의 아내를 삼아서,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예의(禮義)를 파괴하였으니
,
이것은 실로 천지(天地)에 용납할 수 없고, 고금의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
또 왕씨는 일찍이 국왕의 비()가 되었으니, 비록 부모(父母)가 그 정()을 빼앗아서, 시집보내려고 하더라도
,
마땅히 예()로써 자수(自守)하여 절개를 잃지 않아서 그 몸을 마쳐야 할 것인데
,
도리어 절개를 버리고, 남을 따라서 크게 부도(婦道)를 잃었으니, 또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려에서는 왕비라 할지라도 재혼이 가능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료입니다
.
하지만 왕조가 바뀌고 나서 사간원들이 상소하여,
재혼하여 새 살림을 차린 선비 왕씨의 삶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새 남편 유은지를 봉주로 귀양 보내면서 선비 왕씨와 이혼시키고는 배주로 귀양을 보냅니다.
왕의 후비는 당연히 후비로 살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에 재혼이 가능했다니 흥미롭습니다.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되고 유은지는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역사의 슬픈 한 장면이네요.


고려말을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여성의 재혼은 엄격히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
고려말의 왕인 우왕의 후비 선비 왕씨와 유은지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이겠지요.